2013년 5월 18일 토요일

[야설 ] 강간범의 변명 -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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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 ] 강간범의 변명 - 7부
다음 날.

여행 가기 하루 전인 금요일에 나는 종일토록 야동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성인 유료 사이트에 돈을 주고 가입 한 뒤 야동을 보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나는 놀람의 수준을 넘어 경악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근친, 동성애, 항문섹스, 그룹섹스, 수간에 이르기까지, 동영상은 그야말로 섹스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만드는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것이 이제껏 섹스에 대해 내가 생각해 왔던 상식을 넘어 선 것으로 한 편 한 편 볼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여자는 많고 섹스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구나.”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눈이 아프도록 동영상을 보고 탄식하며 내가 한 말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드디어 기다리던 날이 밝자 나는 미리 꾸려 놓은 가방 두 개를 들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한 나는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혼잡한 사람들 사이를 뚫고 가이드가 지정해 준 곳으로 갔다.

‘......!’

그곳에 열심히 뭔가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녀의 가슴에 안지현이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제대로 찾아왔군.’

나는 속으로 안도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일단의 무리에게 설명을 마치고 잠시 한숨을 쉬던 그녀가 내 얼굴을 보더니 바로 묻는다.

“혹시 일본여행 가시는 분?”

“예.”

“강철수씨?”

“어떻게 제 이름을 아세요?”

내가 신기해서 묻자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이번 여행에 싱글로 가시는 분은 강철수씨 혼자거든요.”

“아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웃자 그녀가 서류 같은 것을 내밀었다.

“여기 기입할 것이 있으니까 잘 읽어보시고 볼펜으로 적으세요.”

나는 그녀가 하라는 대로 따라 했는데 그 다음부터 모든 것을 그녀가 지시해주니 비행기를 탈 때까지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되자 나는 가이드를 따라 비행기에 탑승했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라 호기심이 무척 컸지만 나는 촌놈이란 소릴 듣지 않으려고 무심한 척 태연한 얼굴로 비행기 안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일본을 많이 가는지 안에 좌석들이 굉장히 많았고 한꺼번에 사람들이 몰려 비행기 안은 금방 혼잡해졌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내 번호를 찾아 자리에 앉고 한 시름을 돌렸는데, 비행기 좌석이란 게 버스보다 오히려 작고 불편했다.

특히 앞뒤 사이의 간격이 좁아 다리가 긴 내가 앉으려니 구겨서 앉는 느낌이 들고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거 굉장히 불편하겠구나.”

낮게 투덜거리며 창밖을 보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여자가 통로에서 짐칸에 가방을 넣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방을 다 넣고 여자가 자리에 앉기 전에 먼저 나를 쳐다보았다.

두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는다.

‘......!’

순간 콧속으로 은은한 향수냄새가 들어왔다.

굉장히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냄새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여자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다시 창쪽으로 돌린 채 조금 전 보았던 여자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상당히 예쁜 얼굴이었다. 갸름하고 작은 얼굴에 선명한 이목구비, 무엇보다 깨끗하고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한 가지 흠이라면 눈매가 싸늘해서 약간 차갑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때 내 생각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통로 쪽에서 들려왔다.

“우리 좌석 여기야?”

고개를 힐끗, 돌려보니 한 남자가 여자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여자가 말 대신 고개만 끄덕이자 남자도 역시 작은 짐들을 짐칸에 넣고 여자 옆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약간 실망을 해 다시 창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여자가 혼자였다면 무슨 수작이라도 걸어보려 했는데 파트너가 있으니 애초에 틀린 일이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걸어가듯 천천히 움직이던 비행기가 점점 속도를 내다 활주로에 도착해 잠깐 숨을 고르더니 이내 엄청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우웅-기이잉-

비행기가 굉장한 속도로 달리자 한 번도 그런 속도를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나는 당황했다.

그러다 비행기가 기체를 들고 지면에서 날아오르자 나는 당황을 넘어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뭐야. 이대로 날다 곤두박질치면 끝장이잖아? 아직 죽기 싫은데.’

흘낏, 창문을 보니 비행기가 공중으로 하염없이 날아오르는데 생각보다 그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양옆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버티다 잠간 옆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때 딱,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우. 뭐야!’

여자가 마치 동물원 원숭이 보듯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내 모습을 보고 있는데 딱, 비웃는 표정이다.

여지없이 촌티를 드러낸 것 같아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주변 다른 사람들을 봐도 다들 태평한 모습에 나처럼 긴장하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쪽팔려 죽겠네.’

나는 얼른 손아귀에 힘을 풀고 표정을 억지로 고쳐 평소의 안색을 회복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완전히 이륙한 뒤 수평이동을 하자 나도 마음이 편해져 창밖으로 시선을 둔 채 주변경관을 즐기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갔을까?

방송이 흘러나왔다.

“전방에 난기류가 있어 기체가 흔들릴 수 있으니 안전벨트를 작용하시고 화장실 가는 것을 삼가 주십시오.”

처음엔 듣고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비행기가 구름층을 통과해 들어가면서부터 극심하게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드르르릉- 쿠구궁-

마치 신화속에 나오는 거인이 비행기를 잡고 흔드는 듯 기체가 좌우로 요동치더니 갑자기 허공에서 밑으로 뚝, 떨어졌다.

‘아우. 씨발. 암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오늘 비행기 추락으로 죽는구나.’

다시 좌석 손잡이를 피가 나올 정도로 단단히 움켜잡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이래도 안 놀라나 보자.’

여자의 얼굴을 보니 그녀가 처음과 비슷하게, 아니, 처음보다 더 입가에 미소가 진해진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아놔. 이게 정말 나를 완전 촌놈으로 보겠네.’

순간, 공포속에서도 엄청 쪽팔리는 기분을 맛보다가 그 옆의 남자를 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여자의 남편인 듯한 그 남자는 아예 두 눈을 감고 얕은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또 다시 표정관리를 하며 평상심을 찾으려 애 썼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나보다는 옆의 사람들이 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나는 이제 곧 암으로 죽을 놈인데 지금 당장 비행기가 추락한다면 여러 동반자가 생기니까 덜 억울할 거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비행기가 추락할 것에 대한 공포가 더욱 심해 다른 생각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지가 않았다.

그렇게 5분 정도 비행기가 요동치다 마침내 밝은 햇살이 비취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행기는 평온을 되찾으며 순조롭게 비행을 계속했다.

‘후우. 추락은 면했나보다.’

그 5분이 영겁인 양 두려움에 떨던 나는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손잡이를 잡았던 손에 힘을 뺐다.

‘......!’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바닥이 땀에 흥건하게 젖어 있어 나는 두 손을 바지에 문지르고 다시 여자를 힐끗,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는데 여자의 얼굴에는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 역력했다.

‘씨. 지 남편에나 신경 쓸 일이지, 왜 외간남자에 관심을 두고 비웃기까지 하냐?’

그렇게 여자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데 다시 방송에서 곧 착륙한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뭐야? 벌써 다 왔어? 일본이란 나라 정말 가깝구나.’

곧 이어 비행기가 아래로 내려가는데 좌우로 흔들리면서 가지만 이륙만큼 두렵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동체가 활주로에 닿아 미끄러지자 나는 눌렸던 가슴이 편안해지며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무슨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마저 생겼다.

비행기가 완전히 정지하자 사람들이 부산하게 내릴 준비를 했고 내 옆에 앉은 여자도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그리고 여자가 가기 전 나를 한 번 보고 살며시 웃는데 마치 그 모습이 ‘너 때문에 오는 동안 지루하지 않았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에이 씨발. 앞으로 어지간하면 비행기는 타지 말아야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여자 뒤에 서서 그녀를 따라 비행기에서 내렸다.



어느 정도 복잡한 통관절차를 거친 뒤 출구를 빠져나오자 가이드가 먼저 앞으로 나섰고 나도 뒤를 따르는데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뿐 아니라 제법 많았다.

“자. 제가 출석을 부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수학여행을 오신 거예요. 저는 선생님이구요. 제 말을 듣지 않으면 여러분은 일본에서 길 잃은 미아가 되니까 앞으로 어딜 가든 항상 저를 눈에서 놓지 마세요. 아셨죠?”

가이드가 사람들 앞에서 활짝 웃으며 말하자 군데군데서 예,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명철님!”

“예.”

“김명철님 가족은 모두 네 분 맞으시죠?”

“예.”

나는 가이드가 호명하고 사람들이 대답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숫자를 헤아려 보았다.

일행은 모두 한 삼십 명쯤 되는 것 같은데 거의 대부분 가족단위로 온 거 같았다.

그리고 그 가족이란 게 온천여행이라 노부부 위주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젊은 커플도 꽤 있었고 바로 얼마 전까지 나를 비웃던 그 여자도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일행이었다.

가이드는 마지막으로 나를 호명한 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우리 일행을 모두 태우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가이드는 일본여행에 대해 여러 가지 말들을 해 주었다. 특히 여행에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요약해서 말해준 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첫 번째로 관광할 곳은 구마모토입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약간 시간이 걸리니까 그 동안 우리 일행분들 각자 인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여기 타신 분들 모두 3박4일 동안 함께 부대끼며 마칠 때까지 항상 행동을 같이 해야 하는데 시작하기 전에 미리 서로 안면도 익히고 인사 나누면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싫다면 그냥 이대로 가구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좋다는 소리가 나왔다.

가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먼저 김명철님 가족분들 앞으로 나오세요.”

그러자 네 사람이 나와서 각자 소개를 했고 그 뒤로도 사람들의 소개가 계속 이어졌는데 그 가운데 특히 내 시선을 끄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먼저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던 부부가 가장 내 시선을 끌었는데 역시 그 이유는 여자의 뛰어난 외모 때문이었다.

‘민지수.’

여자가 자기 이름을 밝힐 때 나는 그 이름을 머리에 다시 한 번 새겼다.

‘정말 군계일학이군.’

여자의 남편이라고 소개한 남자도 외모는 괜찮았다. 키는 170정도로 작아보였지만 얼굴은 미남 축에 들었고 눈이 반짝거리는데 꽤 영리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한 쌍은 서로 친구사이라고 소개한 여자 두 명이었다. 둘 모두 이제 이십 초반 정도에 평범한 외모를 갖고 있었는데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을 맞아 일본여행을 온 것이라고 소개를 했다.



다음도 역시 여자 두 명. 이 그룹은 나이가 조금 있었다. 한 사람은 사십이 조금 넘어 보이는 평범한 외모의 여자였고 다른 한 여자는 이제 사십 줄로 들어선 듯 보이는데 몸매가 가늘고 얼굴은 굉장히 세련돼 보이는 여자였다. 이들 둘은 자매라고 간단하게 소개했는데 동생인 여자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로 몸이 부실한지 얼굴에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소개할 분은 우리 일행 중 유일하게 솔로로 오신 분이신데요.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강철수씨.”

가이드의 호명에 내가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받았다.

“강철수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여섯이구요. 지금 시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 오게 된 계기는요. 제가 이번에 일주일 휴가를 받게 되었는데 이 기회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해외여행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신청하게 됐습니다. 음. 그리고 혼자 온 이유는요. 제가 아직 미혼이고 갑자기 여행을 결정하게 돼서 같이 올 파트너를 잡지 못해서 이렇게 혼자 오게 됐습니다. 아무쪼록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앞으로 여행 마칠 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잘하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힘을 쓰는 일입니다. 앞으로 뭐 무거운 짐을 든다든지, 힘을 쓸 일이 필요하면 저를 불러주십시오.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웃으며 말하자 좌석에서 누군가 내 말을 받아쳤다.

“어이. 총각. 아까운 힘 아무 때나 낭비하지 말고 일본에서 밤이 외로운 여잘 찾아보게. 남자가 힘을 쓸려면 그런 데다가 한 방에 써야지.”

“와하하.”

“하하하!”

아마도 나이가 많이 드신 노인네 한 명이 농담을 한 모양인데 그 말에 좌중은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변해버렸다.

노인에게 뭐라 대꾸하기도 그렇고 해서 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고 자리에 돌아왔다.

마지막 농담으로 한 바탕 웃고 보니 벌써 가족처럼 사람들 사이가 화기애애하게 변한 것 같았다.



버스가 마침내 첫 번 여행지인 구마모토성에 도착했다.

가이드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일행과 함께 성으로 올라갔다.

구마모토성은 시내 복판에 있는 것 같은데도 조용하고 또 아주 깨끗했다. 건축물도 고아하고 웅장하며 신비한 느낌마저 들 정도로 멋이 흘러넘쳤다.

그래서일까, 그곳엔 우리 말고도 많은 관광객들이 먼저 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내 눈길을 끄는 무리가 있었다.

‘......!’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는데 체형이나 차림새로 보아 중학생이 분명했다.

나는 남학생들보다 여학생들에게 관심이 더 갔고 여학생무리의 뒤를 따라 서서히 올라가는데 시끄럽게 일본말로 재잘거리는 것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역시 외국에 온 실감이 나는 구나.’

한참을 올라가자 넓은 공터가 나타났고 그곳 자판기에서 생수 한 병을 빼내 나는 물을 마셨다. 그때 가이드가 내 옆으로 와서 말을 걸었다.

“혹시 사진 찍고 싶으면 말 하세요. 내가 찍어 드릴 테니.”

“아닙니다. 카메라도 안 가져왔고 사진 찍고 싶은 마음도 없네요.”

그러자 가이드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쳐다본다.

“조금 특이하네요. 처음 관광오신 분들 대부분 사진밖에 남는 게 없다면서 사진만 찍고 가시는데. 물론 관광 많이 하신 분들은 사진 잘 안 찍긴 해요. 어차피 사진이란 것도 여행 끝나고 한 번 보면 앨범에 넣어 놓고 다신 안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곧 죽을 놈이 사진 같은 거 찍어서 뭐하겠냐고 말 할 수는 없었으니까.

“저쪽 한 번 가보세요. 볼 거 좀 있어요.”

가이드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따라 내가 걷자 그녀가 내 뒤를 따랐다.

그곳은 실내여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곳이었는데 통로가 좁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전시물들 보세요. 밑에 한국말이 써 있죠?”

가이드 말에 내가 전시물을 보니 그녀 말대로 전시물을 소개하는 글에 일본어, 영어, 그 밑에 한국어가 있었다.

내가 놀라자 가이드가 웃으며 설명했다.

“일본 내 우리나라의 위상이 이처럼 높아졌단 뜻이에요. 옛날에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많이 무시하고 깔보는 경향이 많았는데 지금은 굉장히 한국에 관심도 많고 한국사람들을 많이 좋아하죠.”

“언제부터 그렇게 됐을 까요?”

내가 묻자 가이드가 웃으며 대답했다.

“배용준씨 공이 아주 커요. 한국에서 욘사마하면 그냥 일본에서 인기 좀 있는 정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 일본에서 그 인기가 정말 하늘을 찔렀어요. 그 후로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그 공로를 생각하면 배용준씨 정말 대단한 거예요.”

“그렇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그때 뒤에서 누군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앳된 여자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어떤 교복을 입은 여자애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까 본 그 중학생 무리 중 하나였는데 아이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는 여자여서가 아니라 아이가 너무 깜찍하고 귀엽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 곁에는 친구로 보이는 여자가 두 명 서 있었는데 여자아이가 너무 예뻐 그 친구 둘이 그 존재감을 잃을 정도였다.

“아.”

나는 입만 벌리고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일본 여자애가 한국말로 인사를 했으니 나도 예의 상 일본말로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젠장, 내가 일본말을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야동을 안 보고 일본말 공부라도 조금 하고 올 걸 그랬나보다.

결국 나오는 말이 한국말밖에 없었다.

“안녕!”

내가 웃으며 인사하자 여자아이가 활짝 웃는데 그야말로 봄날에 어린 꽃이 활짝 피어나는 느낌에 가슴까지 설레어 온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본 드라마가 생각이 났다.

첩보드라마였는데 거기서 남자주인공이 일본에 가고 일본에서 일본소녀를 만나는데 소녀가 주인공이 잘생겼다며 무척 따랐다. 이름이 유끼였던가? 결국 드라마에선 주인공 때문에 킬러에게 죽고 마는데 하여간 이 소녀를 보니 그때 드라마에 나온 소녀처럼 아이가 깜찍하고 예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가이드가 소녀에게 뭐라 일본말로 물었다. 소녀는 대답했고 한참 동안 대화를 하더니 곧 나에게 손을 흔들며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안녕히 가세요.”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최대한 인상 좋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

소녀가 떠나자 가이드가 나와 같이 걸으며 소녀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오키나와에서 여행 왔다고 하네요. 중학교 2학년들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수학여행을 온 거죠.”

“아. 오키나와면 일본 남쪽에 있는 곳 아닌가요?”

“예. 맞아요. 일본이면서도 일본이 아닌 곳이죠.”

“예?”

“원래 오키나와는 일본땅이 아니었어요. 독립국가였죠. 우리나라처럼요.”

“아.”

“그런데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속국으로 만든 것처럼 오키나와도 그렇게 침략했고 자기 나라로 만든 것이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끝까지 저항을 해 독립을 했지만 오키나와는 그 반대로 일본에 영구귀속이 된 거예요.”

“그렇군요.”

“그 과정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에 배신을 당하고 쓰라린 기억들이 많아서 주민들 중 일본에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대신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놓였던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서는 굉장한 호감을 갖고 있죠.”

“아.”

“아까 그 아이도 한국에 대해 아주 호감을 갖고 있고 지금 한국말도 많이 배우고 있는 중이래요. 고등학교 가면 한국으로 여행도 갈 거라는군요.”

“하하. 그 아이 참 예쁘게 생겼던데.”

내 말에 가이드가 나를 보며 웃는다.

“호호. 아까 그 아오끼도 철수씨 보고 잘생겼다고 마음에 든다고 하던 데요?”

“이름이 아오끼예요?”

“예. 요시다 아오끼.”

“하하. 뭐 좋게 봤다니 다행이군요.”

나는 심상한 표정으로 가볍게 대꾸한 뒤 그녀와 실내를 빠져나왔다.



그 뒤로도 구마모토성을 돌면서 우연인지 아오끼란 소녀를 몇 번 더 보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소녀는 나를 향해 장미꽃처럼 예쁜 미소를 보내왔다.

아마도 나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인데 정말 한 입에 삼켜도 비린내 하나 나지 않을 만큼 귀여워 둘 다 소속돼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작업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에겐 시간이 없었고 당장 이제 그만 내려가라는 가이드의 사인까지 받자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버스가 있는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에 나는 눈에 익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나와 같은 일행 중 한 그룹이었는데 각자 소개할 때 내 관심을 끌었던 사십 대 자매였다.

언니가 동생을 길가에서 부축하고 있는 데 뭔가 곤란한 상황이 발생한 것 같아보였다.

“왜 그러세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

동생을 부축하고 있던 언니가 나를 보더니 반색한다.

“저기 마침 잘 만났네. 우리 좀 도와줄래요?”

“무슨 일이신데요?”

“저기. 동생이 몸이 좀 약해요. 올라올 때는 잘 왔는데 내려가려니까 다리가 풀려서 잘 못 걷겠다고 하네.”

“아! 그러세요?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내가 동생의 어깨를 부축하는데 여자가 힘없이 내게 완전히 기대오자 나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부축으로는 힘들겠고 제가 업어야할 것 같네요. 자 제게 업히세요.”

여자도 그래야할 상황이란 걸 알고 순순히 내 등에 업혔다.

“아유. 이렇게 신세를 져서 어떡해요?”

언니가 고맙다는 표현을 하자 나는 여자를 업은 채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으며 말했다.

“하하. 저 군대에서 특전부대에 있었거든요? 여자분들은 군대에 대해 잘 모르시겠지만 우리나라에서 특전사출신이라면 최고라고 인정해주죠. 그런데요. 거기 있을 때 완전군장을 하고 하루 종일 산악훈련을 할 때가 있었어요. 무거운 군장을 등에 지는 것도 힘이 드는데 그 상태로 하루 종일 산을 탄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유. 힘들겠다.”

언니가 거들자 나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저는 그 힘든 산악훈련에서 낙오 한 번 안 당하고 모든 임무를 수행했죠. 그런데 지금 제 등에 업히신 분 무게가 완전군장할 때보다 더 가볍네요. 이런 상황이라면 산 하나 타는 것도 우스운데 저기 잠깐 내려가는 거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장황하게 자랑 같은 말을 한 것은 결국 이런 호의쯤은 아무 것도 아니니 부담 갖지 말라는 뜻으로 한 거였다.

내 뜻을 파악했는지 등에 업힌 여자가 입을 내 귀에 바짝 붙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고마워요.”


힘은 없었지만 뚜렷하게 귀에 울리는 그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닙니다. 제가 아까 버스에서 자기 소개할 때 말씀 드렸는데 힘을 쓰는 일이라면 뭐든 도와드릴 수 있으니까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저한테 말씀하세요.”

내가 밑으로 처진 여자의 엉덩이를 한 번 등 위로 추켜세운 뒤 말하자 여자도 내 목을 꽉 끌어당기며 물었다.

“아까 소개할 때 이름이... 철수씨라고 했었나요?”

“하하. 예. 제 이름이 워낙 흔하다보니 기억하긴 쉽죠. 성은 강이구요. 강철수입니다.”

“내 이름은 기억나요?”

여자가 묻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잘 기억이...”

내가 말끝을 흐리자 여자가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호호. 곽민정이에요.”

“아.”

잠시 듣고 있던 언니가 끼어들었다.

“내 이름은 곽순정이라고 해요. 혹시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때 또 철수씨한테 부탁해도 될 까요? 우리 동생에겐 이번 여행이 조금 무리가 따르는 여행인데 나는 여자이다 보니 힘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말이죠.”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언제든 부르기만 하시면 제가 즉각 달려가서 돕겠습니다.”

내가 흔쾌하게 말하자 언니가 감격한 표정으로 내 팔을 꽉 붙잡는다.

“정말 젊은 사람이 마음 씀씀이가 고맙네. 민정아. 그렇지 않니?”

등 뒤에 있던 여자가 언니 말에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느낌이 전해졌다.

나도 도울 수 있어서 마음이 좋았다. 세상을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이렇게 아픈 사람을 보자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버스에 도착해 민정을 내려주고 나도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사람이 모두 차자 버스는 곧 출발했고 일행은 그 다음 코스로 쇼핑을 한 뒤 관광지 하나를 더 구경하고 그 날 묵을 숙소에 도착했다.

호텔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아담한 건물들이 연이어 붙어 있어 주차장에는 우리 뿐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이 계속해서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잠시 대기하라는 가이드의 말에 우리 일행은 짐을 부리고도 한참 동안 주차장에 서 있었다.

나는 무료한 마음을 달래려고 버스에서 내리는 관광객들을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버스에서 낯이 익은 모습들이 보이는 것 같아 나는 눈을 번쩍 뜨고 그곳을 보았다.

‘......!’

내 눈이 맞았다. 지금 한쪽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은 조금 전 구마모토성에서 보았던 그 오키나와 중학생들이었던 것이다.

교복이 특이해 금방 알아볼 수 있었는데 아이들은 역시 버스에서 내리기 바쁘게 웃고 떠들어댔다.

나는 혹시 아오끼를 볼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

아오끼가 버스에서 내리고 있었다.

자기에게 뭐라 한창 수다를 떨고 있는 친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해주는데 그러다 얼굴을 돌려 내 눈과 마주쳤다.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다 이내 활짝 웃는데 그 말없이 반가워하는 모습이 내 가슴을 사정없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아이를 품에 안고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일본에 온 목적을 하나도 달성하지 못하고 경찰에 끌려가게 될 것이다.

“강철수씨!”

멀리서 가이드가 부르자 나는 아쉬운 마음을 얼굴에 나타내 소녀에게 보낸 뒤 가이드를 따르는 일행에 합류했다.

호텔안으로 들어가기 전 잠깐 뒤를 돌아보니 역시 아오끼도 끝까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텔로비에 일행이 다 모이자 가이드가 말했다.

“여기가 오늘 우리 일행이 숙박할 곳입니다. 좀 소란스럽고 급이 떨어지긴 하는데 나쁘진 않은 곳이니 오늘만 참고 지내십시오. 내일 정식 온천지역에 들어가시면 최고급 호텔에 묵으실 거고 마지막 날 호텔은 더욱 훌륭한 곳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으니 오늘만 여기에 맞춰서 지내주세요.”

가이드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녀에게 감사했다.

여기서 아오끼를 보았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뭔가 인연이 닿은 것 같아 좋았고 뭐 호텔부대시설이야 좀 후져도 상관없는 일이니까.



호실을 배정받아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객실이 나를 반겼다.

2인 1실이라 조금 작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나는 혼자라 상관이 없었다.

짐을 풀고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사시미칼을 가방에서 꺼냈다.

칼집에서 꺼내자 날이 시퍼렇게 선 칼이 드러나는데 보기만 해도 선듯하게 느껴졌다. 세 개 중 가운데 사이즈의 칼만 가져왔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어서 다 가져오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것을 파카 안주머니에 잘 갈무리한 뒤 객실을 나와 호텔로비로 갔다.

로비에 비치된 소파에 앉아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낯익은 일행들의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자리에 들기는 이른 시간이었고 이국땅에서의 여행 첫날, 무미건조하게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저녁을 즐기기 위해 당연히 하나둘 로비에 모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커플들이 있었다.

친구지간에 여행 왔다던 그 대학 3년생인 여자 두 명에게 지금 남자 둘이 작업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 둘도 일행 중 한 그룹이었다. 둘 다 사십 정도 돼 보이는 그들도 친구 둘이 어울려 여행을 왔다고 했다. 한 남자는 앞머리가 M자형으로 벗겨지고 아랫배가 나와 전형적인 중년아저씨의 모습이었고 다른 한 명도 전반적으로 머리숱이 없기는 마찬가지면서 흰머리까지 많아 외모가 볼품이 없었다.

그런데 동성끼리 온 사람들은 아픈 자매를 빼고 그들 두 그룹뿐이라 아마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아저씨들이 지금 여대생에게 작업을 거는 것 같았다.

“허허. 이렇게 같이 여행 온 것도 인연인데 나가서 술이나 한 잔 하지. 우리가 아주 좋은 데로 모실 테니까.”

좋은 데로 모신다는 말에 아가씨 둘은 금방 거절을 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그 중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 나를 향해 소리쳤다.

“어머. 어디 놀러 가려고 나오신 거예요?”

“아, 예.”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하자 말을 걸었던 그녀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단발머리 안에 보이는 얼굴은 평범했고 약간 통통한 데다 작은 키 등 별로 시선을 끌 타입이 아니다.

“저기. 할 일 없으면 우리랑 같이 나갈래요?”

단발머리가 내게 말을 거는 사이, 다른 여자 하나도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 여자는 단발보다 인물이 조금 더 나았다.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긴 생머리는 탄력이 있었고 키도 단발보다 더 크고 날씬했으며 얼굴 생김새도 조금 더 나았다.

물론 내가 볼 때는 ‘도토리 키재기’ 로 둘 다 그다지 마음에 혹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긴머리도 내 곁에 바짝 다가와 내가 승낙하길 바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다.

난처해진 내가 뭐라 말을 할까, 망설이다 여자를 따라온 두 중년아저씨를 보았다.

‘......!’

그들 얼굴에는 똥 씹은 표정이 역력했다. 순간, 그들이 불쌍해 보여 나는 단발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왠지 혼자서 조용히 보내고 싶네요. 다음에 시간이 맞으면 같이 한 잔 하죠. 그땐 내가 사겠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자 여자 둘의 얼굴엔 실망이, 남자 둘의 얼굴엔 희망이 교차했다.

“할 수 없죠.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단발이 친구와 함께 중년아저씨를 따라 호텔 밖으로 나섰다.

‘과연 저 두 아저씨가 여대생들을 꼬실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그 생각을 하며 웃음을 짓고 있는데 누군 가 옆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같이 어울려 놀지 그러셨어요?”

고개를 돌려 보니 가이드가 생글거리며 내게 말하고 있다.

“그래도 되지만 왠지 그 아저씨들이 불쌍해보여서요.”

“호호. 철수씨는 마음씨도 착하네요.”

“아닙니다. 저. 이제 업무 다 끝나셨죠?”

“네. 내일 아침 기상 때까진 나도 프리예요.”

가이드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하자 내가 물었다.

“저랑 술 한 잔 하실래요?”

그러자 가이드가 조금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 우리 여행사에선 가이드가 손님하고 업무 외에 어울리는 걸 싫어해요.”

“아!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여러 가지 잡음이 생기니까요. 회사 이미지에 좋지 않은 타격이 될 때도 많구요.”

“제가 실례되는 요구를 한 셈이네요.”

내가 싹싹하게 물러서자 가이드가 잠시 망설이다 내게 말했다.

“그럼 맥주 몇 병만 사주실래요? 그 정도는 괜찮은데요.”

“좋습니다. 가시죠.”

나도 가이드가 진드기처럼 붙는다면 내가 먼저 처낼 상황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일을 치르기가 곤란해 시간을 조금 때울 생각으로 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뿐이었으니까.

호텔을 벗어나자 곧 어두운 골목길이 나타났다.

“이거. 굉장히 어두운데요?”

내 말에 가이드가 웃으며 대답해준다.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선진국인데도 이렇게 거리에 나가면 조명이 별로 환하지 않아요. 그것뿐인가요? 호텔에서 자보면 알거예요. 객실 온도도 우리 한국에 비해 굉장히 낮은 편이구요.”

“그렇군요.”

“일본 사람들 방은 또 다다미여서 한국의 온돌과 다르죠. 일본사람들 굉장히 춥게 잠을 자요.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따끈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그렇게 말해요. ‘아. 따뜻하다. 행복하다.’ 그렇게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고 사는 민족이 일본인이에요. 밖에서 보면 돈이 많은 선진국이지만 나라가 부강한 것이고 실제 일본 서민들 사는 거 보면 우리나라보다 못하고 사는 사람들 굉장히 많죠.”

“아. 그렇군요. 우리나라 사람들 반성 좀 해야겠는데요?”

“그렇죠?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 전기낭비가 너무 심해서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관광 오면 그것 때문에 많이 놀라는 편이죠.”

그렇게 말을 나누며 한 10분쯤 걸었을까?

제법 불이 밝혀진 간판들이 보이자 가이드가 내게 말했다.

“일본에 왔으니까 우선 이자카야에 들러 술을 마셔보세요.”

“이자카야?”

“예. 우리 한국으로 말하면 선술집이나 대폿집을 말하는데 일본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죠.”

“아.”

“일본사람들은 우리하고 술 마시는 습관이 조금 달라요. 한국사람들은 술을 한 번 입에 대면 끝을 보겠다고, 죽자고 마시는데 일본인들은 그렇지가 않죠. 술을 절제한다고나 할까?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지만 하여튼 일본인들은 직장이 끝나면 집에 가기 전 이자카야에 들러 가볍게 청주나 맥주 등을 기울이며 하루 스트레스를 풀고 집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럼 거기로 가죠.”

“예. 값도 싸고 괜찮아요.”

가이드와 함께 들어간 이자카야란 곳은 그냥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물론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간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오뎅이나 떡볶이 같은 것을 파는 곳에 술만 더 얹어 파는 실내포장마차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 거 없죠?”

자리에 앉으며 가이드가 말하자 나는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래요. 일본이라고 우리보다 훨씬 더 나은 생활을 할 것 같지만 오히려 속을 보면 더 검소하고 소박한 사람들이 많아요.”

“배울 점이 많네요.”

내 말에 가이드가 웃으며 나를 본다.

“맞아요.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일본이라면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옛날 역사일 뿐이고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그저 하나의 인간일 뿐이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자 가이드가 웃으며 술을 주문했다.

“난 맥주 마실 건데, 철수씨 뭐 드실래요?”

“같은 걸로 하죠.”

“난 아사히 맥주를 좋아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세금이 붙어 비싸기 때문에 잘 안 마시는데 이렇게 일본에 오면 싸게 마실 수 있으니까 꼭 아사히 맥주를 마시죠.”

“나도 아사히로 할게요.”

주문한 맥주가 나오자 나는 그녀에게 건배를 청하며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어때요?”

가이드가 궁금한 표정으로 묻자 내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네요. 사실 술을 별로 많이 안 마셔봐서 맛을 잘 모르는데 이 맥주는 뭔가 부드러우면서도 잘 넘어가는 게 느낌이 좋네요.”

“그렇죠?”

“그런데요. 이런 거 물어보면 실례려나?”

“뭐요?”

“가이드님. 나이가 몇이세요.”

“호호. 몇 살로 보이세요?”

“글쎄요. 내가 여자 나이를 맞추는 능력이 전혀 없어서. 한 서른 살?”

“비슷하게 맞췄네요. 서른둘이에요.”

“아.”

나는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국장 사모님하고 같은 나이구나.’

한데 너무 비교가 되었다. 사모님은 가이드보다 어려 보이기도 했지만 몸매나 얼굴이 가이드와 비교도 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가이드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다.

“가이드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까 빨리 늙는 거 같아요.”

“왜요? 이렇게 여행 자주 다니시면 즐겁고 좋을 거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이번 여행은 다 좋은 분들만 오신 거 같아서 마음이 놓이는데 사실 손님들 만나기 전에 무지 긴장해요.”

“......?”

“가이드를 하다 보면 손님들 중에 꼭 이상한 사람들이 끼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손님들 만나면 우리 가이드는 여행 중에 진이 다 빠져버리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자기 주장대로 하려하고. 정해진 시간에 많은 걸 보여주고 싶은 우리로선 그런 분들 만나면 시간 펑크나지, 신경 곤두서지, 하여간 제일 먼저 일행분들 파악할 때 그런 분 없는지 먼저 살피는 것이 습관이 돼버렸어요.”

“거참. 세상에 쉬운 직업이 없군요.”

“그렇죠 뭐. 그리고 이렇게 여행을 오는 사람들을 여러 번 경험하다 보면 별사람들을 다 만나요. 가령, 일본까지 여행 와서 객실에 목을 매고 자살한 사람도 있고.”

“자살을 해요?”

“사업에 실패하거나 죽을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여행을 선택하고 그렇게 일본이라는 타국까지 와서 자살을 하는 경우가 꽤 있어요.”

죽을 병이란 말에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군요.”

“여기서 죽진 않더라도 여행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자살한 사람도 있구요. 부모님이 죽을 병에 걸려 돌아가시기 전 자식들이 마지막 효도로 여행을 시켜주는 경우도 있어요. 아무튼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이 해외여행이 속을 들여다보면 정 반대인 경우가 있으니 아이러니하죠.”

“음.”

“사실 이번 우리 일행에만 해도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가이드의 말에 나는 문득 곽민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혹시...”

가이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늘 구마모토성에서 철수씨가 업고 내려 온 곽민정씨.”

“얼마나 상태가 안 좋은데 죽을 병까지 걸린 걸까요?”

“나도 정확한 거는 모르지만 그 언니 되신 분 말씀에 의하면 앞으로 얼마 살지 못할 거라 하더군요. 저번에 암 수술을 한 번 받았는데 이번에 다른 장기로 재발이 되었고 2차 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이번에는 심각한 상황이라 수술 도중에 죽을 수도 있다고 하고 수술이 성공해도 얼마 살지 못한다고 그러더라구요.”

“후우.”

그 말을 듣자 남의 일 같지 않아 내가 어두운 안색으로 맥주를 들이켰다.

“곽민정이란 분은 나도 어느 정도 아는데 한국에서 꽤나 유명한 디자이너예요. 어렸을 때부터 모델로 뛰어들었는데 모델로는 큰 인기를 얻지 못하다가 삼십이란 나이에 디자이너로 전향했죠. 그때부터 재능을 나타내 10년 만에 그쪽 업계에선 최고로 명망 있는 지존이 된 입지전적인 여자분인데 그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 정말 안 됐어요.”

“아.”

어쩐지 어디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유명한 사람이었다니.

“그분 이번 여행에 완전 vip예요. 호텔 객실도 우리와 다른 특실예약이고 비행기도 그분만 일등석이죠. 돈이 엄청 많은 분이라 개인적으로 여행을 갈 수 있는데도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보지 않아 한이 됐다고, 이번에 죽기 전에 단체여행을 하고 싶다고 언니에게 부탁해서 이렇게 어려움 가운데 결행을 하게 된 거래요.”

“그렇군요.”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자 가이드가 내게 말했다.

“이건 철수씨만 알고 있도록 하세요. 개인 신상에 대해 얘기하는 게 금기돼 있지만 철수씨는 앞으로 여행 동안 그분을 도와줘야할 지도 모르니까 내가 특별하게 말하는 거예요.”

“알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자. 이제 우리 그런 우울한 얘기 그만하고 건배 한 번 해요.”

가이드가 잔을 내밀자 나도 잔을 들어 부딪혔다.

“순조로운 일본여행을 위해.”

가이드가 말하자 나는 웃으며 잔을 들이켰다.



“나는 그만 할 건데, 철수씬 아직 부족하죠?”

둘이서 맥주 4병을 마신 다음 가이드가 들어갈 뜻을 밝히자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예. 나는 조금 더 있다 들어갈게요.”

“오는 길은 아실 테고 즐겁게 노시다 들어오세요.”

가이드가 일어나 먼저 나가자 나는 그 자리에서 맥주를 3병 더 시켜 천천히 나눠 마셨다.



술을 적당히 마셨다고 생각이 되자 나는 술집에서 나왔다.

술집과 음식점, 놀이기구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라 거리가 꽤 흥청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호호호!”

갑자기 크게 웃는 여자애들의 소리가 들리는데 왠지 낯설지 않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복을 입은 여자애 둘이서 놀이기구에 붙어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둘 중 한 여학생에게 눈이 가는 순간 나는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

그 여자애는 다름 아닌 아오끼였던 것이다.

‘뭐야? 이 늦은 시간에 여자애들이... 하긴, 멀리 여행을 왔는데 놀고 싶겠지.’

아오끼를 바라보며 잠시 갈등했다.

‘가서 아는 척을 해야 하나, 아니면...’

망설이며 주저하는데 아오끼가 친구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뭐라 얘기했다. 그러자 친구가 아오끼에게 손을 흔들더니 먼저 뛰어가 사라졌다.

‘뭐야? 저애는 왜 친굴 놔두고 혼자 가버리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내가 머뭇거리자 혼자 된 아오끼가 나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한 번 돌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친구가 사라진 쪽을 향해 걸었다.

순간, 나는 또 고민했다.

우연이란 게 자주 겹치면 숙명이라고 이런 상황에 접하고 보니 꼭 저 애를 따먹으라고 하늘이 내게 보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 애와 아는 척을 하면 안 된다.

아는 척을 하는 순간, 나는 아이와 약간의 데이트는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걸로 끝날 뿐이다.

아이를 따 먹으려면 강간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호텔에서 나왔다.

칼이 있고, 눈만 내놓고 얼굴전체를 가릴 모자도 파카 주머니 안에 있었다.

‘해 보자. 너무 어리긴 하지만 뭐 어때? 영계면 더 좋지.’

이를 악물고 나는 천천히 아오끼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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